올림픽공원 올림픽홀 이기병 음향감독

K-POP의 메카

올림픽홀에서 근무한다는 

자체가 큰 자부심 입니다.” 

올림픽공연 올림픽홀 전경
  • Prologue
  • 지난 3월,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하는 이른 더위 속에,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한 올림픽홀을 찾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현재 (사)무대음향협회 이사이자 전)무대예술전문인협회 사무국장 등 협회의 중심에서 물심양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기병 이사님이다. 
  • 이날 찾은 공연장은 주말에 있을 콘서트 준비로 많은 스탭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무전기를 허리춤에 착용한 익숙한 음향감독의 모습으로 감독님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 리틀엔젤스 시절부터 현재 K-POP의 메카 올림픽공원까지 30여 년간 한국 공연 음향의 현장을 지켜온 한 사람의 이야기. 대형 K-POP 콘서트부터 뮤지컬, 발레까지 수많은 공연의 소리를 책임져 온 그는, 무대 위만큼이나 치열했던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는 시간동안 공연 현장을 지켜온 한 사람의 목소리 속에는, 그 시절의 열정과 후배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음향쟁이’ 이기병 감독의 인생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K-POP의 메카가 된 올림픽공원의 무대 뒤 이야기를 함께 들어본다.
올림픽홀 로비 전경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93년도 소리회 시절의 막내를 거처 음향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는 음향쟁이 이기병입니다.

음향을 시작하신 계기가 어떻게 되시나요?

이게 조금 웃긴 일인데요. 친구 매형의 소개로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의 조명 알바를 갔다가 조명으로 입사를 했어요. 그 당시에는 이 계통에서 밥 먹고 살 거라는 생각은 못 했고요. 근데 어렸을때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 라이브로 공연하는 것을 보다 보니 매력을 느껴서 시작한 것 같아요, 우연치 않은 기회로 음향 해 볼 생각 없냐 물어보셔서 신기한 장비들도 많고 배워보면 좋을 것 같다 생각하면서 발을 디딘 것이 지금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1994년 제1회 소리회 정기총회

혹시 그때 보셨던 작품이나 공연 중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실까요?

맨 처음에 한 일은 백조의 호수, 유니버셜발레단의 지방 투어를 돌면서 발레를 처음 접했어요. 차이콥스키의 유명한 작품이잖아요. 무용수들도 너무 아름답고 제가 여러 가지 발레 공연을 해보았지만 제일 좋아하는 레퍼토리가 백조의 호수에요. 그 공연이 음향감독의 길로 꿈을 갖게 한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현 유니버셜 아트센터) 음향실에서

리틀엔젤스라고 하는 극장이 요즘 분들은 잘 모를 텐데 UBC라 해야 알 것 같은데요?

예, 지금은 유니버셜발레단이면서 유니버셜아트센터로 변경이 되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예술 집단이 만들어진 것은 굉장히 오래된 걸로 알고 있어요. 70년대 박정희 정부 때서부터 문화로 우리나라를 국위선양을 하러 해외 공연을 다니는 어린이 예술단으로서 만들었던 걸로 알고 있고, 리틀엔젤스 공연장은 80년도 아시안게임 그쯤에 공연장이 오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니버셜발레단 창작발레 <심청>
유니버셜발레단 문훈숙 단장(가운데)과 함께  
리틀앤젤스 예술단 평양공연 (1998년, 평봉화예술극장
유니버셜 발레단 중국공연 (상하이 동방명주 타워)

리틀엔젤스 시절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음… 기억에 남는 건 평양 공연이었어요. 평양이라는 곳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나라는 아니잖아요. 1998년 5월에 다녀왔는데, 공연 중에 현지 관객들의 표정이 인상 깊었어요. 그냥 감시하는 듯한, 무덤덤한 표정이었죠. 우리는 작품에 감동하면 박수도 치고 환호도 자유롭게 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서는 그런 반응을 볼 수 없었어요. 그분들의 공연도 봤는데, 절도가 있고, 딱딱 각이 맞게 맞춰서 움직이는 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진짜 잘하더라고요.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발레 공연이었는데 각국 대사님들이 많이 오신 VIP 행사였어요. 그때 미니디스크(MD)를 주 플레이어로 두 대 사용했는데, 하나가 에러가 나서 음악이 가다 서다를 반복한 거예요. 그런데 무대 위 외국 무용수가 그 리듬(?)에 맞춰 하수 쪽으로 자연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 그날 결국 시말서 쓰고, 장비 하나 새로 사라는 지시까지 받았던 기억이 있네요.

리틀엔젤스예술회관 (현, 유니버셜아트센터) 음향실.
사운드크래프트 비엔나2 아날로그 콘솔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유니버셜 발레단 <호두까기 인형> 발레공연 후 
(세종문화회관 FOH, 2003년 추정)

그곳에선 얼마나 근무하셨나요?

15년 정도 근무했어요. 2008년도 12월 31일 호두까기 발레 그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전 단원들, 스텝들 있는 데에서 인사하고, 예술단장님께 꽃다발 받고 이천 아트센터에 2009년 1월 5일부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천아트센터 개관 멤버로 가신 건가요? 이직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네, 이직하게 된 계기는 이제 그만 돌아다녀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희 애를 낳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첫애 낳을 때엔 평양에 가있었고, 작은 애 낳을 때엔 유럽 돌고 그랬을 땐데, 하루는 작은애가 학교에서 아빠에 대해서 써오라는 글을 집사람이 보여주더라고요. 우리 아빠는 돈 벌어오는 사람, 출장 가는 사람,

딱 두 문장 적혀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한 곳에 정착을 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겠다란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또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지금의 올림픽공원을 입사하게 되었고 올해까지 15년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하셨을까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리틀엔젤스에 근무할 때 제일 친한 친구가 자기 여동생의 친구라면서 소개해 줬어요. 

힘들 때 서로 위로도 하고 위안도 삼고,, 결혼하고 나서가 문제였던 것 같아요. 애도 생기고 집안에 대소사도 내가 출장가있으니 혼자 결정해야 했고 그런 점이 참 미안한 것 같아요. 지금도 집사람이 아기 낳을 때 옆에 없었다고 이야기해요(웃음).

올림픽공원 올림픽홀 내부. 고정석 2450석,
스탠딩 700석 규모의 대형공연장이다.
올림픽 홀 옆에 위치한 237석 규모의 콘서트 전문공연장인
뮤즈라이브. 메이어사운드 스피커와 최신 콘솔기종인
Digico Quamtum 225가 설치되어 다양한 공연에 대응하고 있다.

올림픽공원의 공연장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저희 올림픽 공원은 여러 시설이 있지만 정식으로 등록돼있는 공연장은 4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올림픽홀은 2,450개의 고정석과 약 700석의 플로어석으로 구분되어 있고 대중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공연장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금융아트홀은 옛날의 역도 경기장을 리모델링 해서 만든 1,180석의 뮤지컬 전문 공연장이고 세 번째로 뮤즈라이브는 237석 규모의 각종 세미나나 어린이 뮤지컬 등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케이아트홀은 400석 규모로 우리금융아트홀과 같이 프로시니엄 구조의 공연장인데 아레나 형태로도 운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돼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장인데 이곳을 공연장으로 리모델링해서 운영한다는 것에 체육계에 반발은 없었나요?

물론 반발이 있었죠, 여기는 올림픽 유산물이거든요. 우리금융아트홀이 옛날의 역도 경기장이었을 때 역도 협회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솔직히 역도를 많이 하지 않았고, 체육 경기를 하기에도 좀 부족한 부분들이 있어서, 외관은 올림픽 유산물이기 때문에 건들지 않고 내부만 고쳐서 공연장으로 등록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직의 이름과 구성이 어떻게 되나요?

한국체육산업개발 주식회사라고 국민체육진흥공단 자회사입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자본으로 올림픽 시설물을 관리하는 회사를 만든 거죠. 저희 회사에는 6개 실이 있고 그중 공원사업실 안에 문화사업팀에 속해서 공연장뿐만 아니라 체조, 핸드볼경기장의 대관 부분을 맡고 있습니다. 공연장으로 정식 등록된 곳에는 각 파트별 감독들이 상주하고 있고요. 우리금융아트홀은 뮤지컬을 하다 보니 무대 2명 조명 1명 음향 1명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뮤즈라이브는 작아서 올림픽홀과 같이 관리를 하고요.

관리의 주체가 국민체육진흥공단이라고 하셨는데 대중음악을 부흥시키고 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으셨을까요?

체육회에서 관리한다 하지만 문화는 우리가 계속해서 맡아 왔기 때문에 노하우는 오히려 축적이 되어있습니다. 새로 지어지는 시설관리 공단들이 대관 규정이나 운영 방안 등을 벤치마킹하러 많이들 오시기도 하고요.

리틀엔젤스에서 15년, 올림픽공원에서 15년이면 두   장르가 많이 다른데 감회가 다르셨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케이팝이 확 뜨게 된 것이 2000년 후반에서부터 유명세를 치르면서 저희 공연장이 케이팝의 메카가 되었어요. 내국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굉장히 많이 오시거든요. 저번 주에는 핸드볼 경기장에서 NCT콘서트를 했고요. 안타까웠던 일이 엑소 콘서트 때였는데 중국 관객이 그걸 보겠다고 암표상한테 100만원 주고 티켓을 산 거예요. 티켓 확인하려고 바코드를 찍는데 가짜에요. 또 어떤 애들은 티켓 잃어버렸다고 울면서 실신하고. 그런 걸 보면 참 안타까워요, 그런 일들을 SNS에 막 올리고 그러면서 문제도 생기고요.

메카의 역할을 한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요?

우리나라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해외를 나가면 외국인들 첫 마디가 차이니스? 제페니스? 이렇게 먼저 물어봤어요. 지금은 해외를 나가면 코리안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KPOP 때문에 우리나라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올림픽공원의 장점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일단 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최소 4천명과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또 지하철 9호선과 5호선이 있어서 접근성이 좋고요, 공원이라 주차 시설 또한 잘 되어있습니다. 물론 연말에 각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면 여기를 벗어나는데만 1시간씩 걸리긴 하지만요(웃음).

올림픽 공연장의 감독으로서 K POP이 공연하기 좋은 시설이나 인프라, 개선점 등을 생각하신 게 있으실까요?

제 소견으론 건축음향 보다는 인테리어나 외관 쪽 신경을 더 쓰잖아요. 그런 부분이 아쉬운 것 같아요, 한 예로 며칠 전 투란도트 오페라를 하는데 야외 88잔디마당 에서도 콘서트를 했어요. 방음 문제가 있어서 컴플레인이 들어오기도 하고, 앞으로 K POP 전용 공연장을 많이 짓는다고 해도 그런 건축음향적인 부분이나 인프라 부분에서 신경 써서 지을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아쉽고, 기획사들은 어떻게 보면 관객 수로 수입을 내기 때문에 그런 데를 찾지 못해서 체육관, 월드컵경기장 이런 곳에서 하게 되고 그런 점이 아쉬운 것 같아요. 예산 때문에 새로 짓지 못하고 체조경기장을 K POP 전문 공연장으로 리모델링 한 것도 그렇고요. 

우리 음향협회가 감독님 어렸을 때 작은 모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발전을 했는데 어떤 감회가 있으실까요?

아마 아르코문화예술연수원(현,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에서 처음 모이기 시작해서 발대식을 해가지고 선배들에게 여러 조언도 많이 듣고, 옛날 선배들이 협회를 위해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어요.

 회원들 규합하려고 전국에 있는 지방 공연장들을 다니면서 협회 소개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사단 법인이 되었고요. 1세대들은 이제 떠나시는 분들도 있고, 은퇴하셔서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 제가 이사로서 협회 활동을 하고 있는데 후배들이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물러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SSM 소식지 만드는 것도 고생하는 게 뻔히 보여요 다 현업에 있는데 이렇게 나와서 인터뷰하고 한다는 게 다 봉사거든 협회를 위해서, 그런 부분은 존경스럽고 칭찬해요. 회원들을 위해서 기술 방향이나 세미나의 형식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실질적으로 회원들에게 득이 되고 재미를 주는 것들을 추구하고 그런 걸 보면 우리 협회도 많이 발전했다는 걸 많이 느껴요.

다시 태어나도 음향을 하실 건가요?

이거 안 해!(웃음), 따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이 계통은 안 할 것 같아요. 얼마나 스트레스받아요, 삶이 긴장의 연속이었고요.

마지막으로 우리 음향협회 후배들, 신규회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조언 참 어려운 건데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되게 다 똑똑해요. 창의적이고 오히려 우리 들이 후배에게 배울 것들도 많더라고요. 음향협회가 인간관계를 넓혀갈 수 있는 곳 중 하나기 때문에 바쁘더라도 시간 내서 참석하고 서로 얼굴도 익히고 교류도 하고 했으면 좋겠어요.

  • Epilogue
  • 이기병 이사님의 스토리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이어져 온 한국 공연문화의 성장기이자, K-POP의 세계화와 함께 달려온 한 음향인의 기록이다. 리틀엔젤스 시절, 발레 무대에서 마주했던 첫 감동부터, 오늘날 올림픽공원에서 펼쳐지는 대형 K-POP 콘서트까지 그의 커리어는 곧 한국 공연예술의 흐름을 관통하는 시간이었다.
  • K-POP이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고, ‘Korean?’이라는 말이 먼저 돌아올 만큼 위상이 높아진 지금, 그 화려한 무대 뒤에는 여전히 치열한 긴장과 집중이 있다. 그리고 이기병 감독은 그 무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리를 통해 순간을 완성시키는 일을 묵묵히 해왔다.
  • “이거, 다시는 안 해요.” 라는 말에 모두가 웃었지만, 그 속엔 수많은 리허설과 실전, 장비 트러블과 극복, 그리고 가족과의 시간 사이에서 치러야 했던 수많은 선택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K-POP 공연도, 지금의 무대음향 협회도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 음향은 보이지 않지만, 공연을 완성하는 가장 섬세한 손길이다. 이제 이기병 감독의 손끝에서 이어진 길을, 젊은 세대의 손길들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차례다.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울려 퍼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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