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대한민국 무대음향의 역사는 계속된다

오늘도 대한민국 무대음향의 역사는 계속된다

오진수 한국음향협회 4대 회장

오늘도 대한민국 무대음향의 역사는 계속된다

1993년 소리회 창단 멤버, 제4대 한국음향협회 회장, 사단법인 무대예술전문인협회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뮤지컬협회 이사, 무대예술전문인 자격검정위원회 2, 3기 위원, 자격검정 출제 위원, 자격검정 업무 총괄, The Staff 발행인, 국립극장 무대기술부장(문화체육관광부 기술서기관), 동아방송예술대, 예원예술대, 미래예술교육원 교수…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든 오진수 고문의 프로필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현업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발자취는 대한민국 무대음향계의 전무후무한 역사로 오늘도 갱신 중이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국내 최초로 디지털 콘솔 시스템과 혁신적인 스피커 시스템 디자인을 극장에 도입하며 무대음향의 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장본인이기도 한 그의 음향에 대한 열정은 화려한 프로필 이전에 진정한 프로 엔지니어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간의 이력으로 증명하고 있다. 34년간 무대음향 오직 한 길로 달려온 오진수 고문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취재 | 성재훈, 사진 | 우성민
편집 | 김수정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국립극장 음향감독으로 출발해서 약 300여 편의 공연에 음향감독으로, 음향디자인으로, 제작감독으로 참여했고 현재는 대학 교수와 공연 연출, 그리고 제2의 직업으로 감리 활동을 하고 있는 오진수입니다.

  제 경력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4대 무대음향협회장과 무대예술전문인협회 이사장직을 거쳐 한국뮤지컬협회 이사, 무대예술전문인 자격검정위원회 2, 3기 위원과 자격검정 출제 위원, 자격 검정 업무 총괄 등 자격증 관련 실질적 업무를 했습니다.

  무대예술전문인협회 이사장직 당시 스테이지 매거진 『The Staff』을 창간하였습니다. 국가 직렬인 방송무대직을 만드는데 직접 기여하였고 문화부 기술서기관으로 정년 퇴임 후 동아방송예술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예원예술대학교와 미래예술교육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연장 및 복합시설건립 통신(음향) 감리를 하고 있습니다.

고문님께서 음향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대 초반에 제 바로 밑에 동생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 충격을 겪어 보니 사람이 빨리 성장하는 계기가 되더라고요. 당시 카메라에 관심이 많아 사진 찍으러 광화문도 다니고 남산도 다니고 하면서 국립극장을 처음 봤어요. ‘여기서 영화를 상영하나?’ 했는데 공연장이었죠. 그때는 제가 직접 카메라 수리도 하면서 돈도 벌었었는데 문득 ‘내가 살아가는데 돈만 좇기보다는 저런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준비를 해서 국립극장에 입사를 하게 됐어요. 굉장히 어렸을 때 시골에서 아버지 따라 장터를 가면 그때는 빈대나 벼룩 약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창이나 조그만 신파극 같은 걸 많이 하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그런 것들을 접한 게 연극이나 공연을 친숙하게 생각하게 된 요인 같기도 해요.

갑작스레 공연장 입사 준비를 하면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쉽진 않았죠. 그래도 당시에는 공무원 입사하는 게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어요. 마침 고등학교 때 무선 통신 관련 자격증을 하나 따 놨었는데 그게 가산점 요인이 됐는지 합격했죠.

처음 접해본 공연장 일은 어땠나요?

1984년도 4월에 입사하였고, 5월이 되면서 국립극장 광장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문화 행사가 하나 기획되었는데 청소년 예술제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저는 신입이니까 직원들이 어려운 일만 전담시키시는 거예요. 매일 TV, 라디오 중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지원해 주는 전기·통신 지원 업무를 거의 전담하느라 공연장은 들어가보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85년도에 남북 문화 교류 공연이 있었는데 평양예술단이 우리 극장으로 오고 당시 뮤지컬 단체인 서울예술단이 평양에 가서 공연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또 지원팀으로 일하느라 공연은 신경도 못 썼어요.(웃음) 그리고 87년도에 주석길 선배가 국립국악원으로 전출하시면서 비로소 그때 음향실로 들어가 근무를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는 음향실에 들어갈 환경이 아니었거든요. 그때부터 정식으로 공연 음향을 했다고 할 수 있죠.

1991년 불가리아
소피아 극장에서의 공연
공성원 선생님을 제외한,
1973년 개관부터 2015년까지
근무해온 역대 음향감독들
1994년 국립발레단의
이스라엘 야외공연

당시 국립극장의 음향팀 구성은 어떻게 됐나요?

그때 음향실 식구들이 7명 있었는데, 대장으로는 공성원 선생님이 계셨고, 주석길 선배랑 최성건 선배, 김형준 선배, 그리고 저와 황수현 감독, 한송헌 감독 이렇게 있었습니다. 이후 주석길 선배와 황수현 감독은 국립국악원으로 전출, 한송헌 감독은 의정부예술의전당으로 갑니다. 최승철 감독, 김호성 감독, 홍윤석 감독, 이형석 감독, 고병일 감독, 이용석 감독 들이 한 식구였고, 지금은 지영 책임음향감독 외 8명이 음향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극장 상주 단체가 있었습니까?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 국립무용단, 국립창극단이 있었고 이후에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면서 7개 단체가 운영됐습니다. 현재는 시즌제로 운영되는데, 당시에도 봄·가을 시즌 공연으로 운영됐어요. 봄 시즌 공연을 마치면 모든 단체가 각각 2~3개의 지방 도시 및 해외에 순회 공연을 하였는데 국립극장의 예산으로 하는 공연이다 보니 지방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요청이 많이 들어와 해외 투어 공연도 많았어요. 공연을 다니다 보면 1년 중 3~4개월은 출장으로 집 밖에 있었죠.

해외 공연을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현지에 좋은 공연이 있으면 꼭 보러 갔어요. 90년도에 LA 공연 마치고는 디즈니랜드를 가게 됐어요. <피터팬> 공연을 봤는데 으슬으슬 추워지는 저녁의 야외인데도 음향을 기막히게 하는 거예요. 강처럼 만든 세트에 실제 배를 띄워서 피터팬과 후크 선장이 날아다니며 결투하는 장면이었는데, 엄청나게 큰 야외 공간에 스피커를 강을 따라 쭉 설치해놓고 배우들의 움직임대로 소리가 이쪽으로 휙휙 저쪽으로 휙휙, 이동하는 그런 느낌이 나는 거예요. 아, 궁금증이 엄청 심하게 나더라고요. ‘어떻게 하는 거지? 이 스피커는 뭐지?’ 궁금해서 가서 사진 하나씩 찍고…

그 후에는 브로드웨이로 갔는데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보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 같아요. 우리는 공연하면 그냥 소리만 키우는 그 정도였는데 그네들은 사운드를 기가 막히게 다루더라고요. 처음 공연 보고는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보러 갔는데 공연이 끝나고 영사관 직원과 무대 가서 이것저것 메모하며 보고 있으니 직원이 와서는 무대를 볼 수 있게 해주더라고요. 무대에는 그렇게 크지도 않은 스피커가 하나만 달려있었는데도 사운드가 그렇게 빵빵하게 나오는 게 신기했어요. MEYER UPA-1C였어요. 제가 아는 건 JBL밖에 없었는데 그때 MEYER Sound를 알게 됐죠.

또 한 번은 영국으로 공연을 나갔는데 대체로 CADAC 콘솔에 MEYER 스피커를 쓰더라고요. 그렇게 외국의 음향 시스템들을 보고 나니까 눈이 번쩍 뜨여서 내가 한 번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음향 개선해보겠다고 문화부 예산 받아서 93년도에 CADAC 콘솔하고 UPA-1C 스피커를 국립극장에 들여오게 됐어요.

1996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
1996년 국립발레단의 이집트 공연
1997년 국립무용단의 시드니 공연

외국에서 보고 배운 시스템을 그대로 우리나라 극장에 도입시키셨군요.

맞아요. 그때 제가 음향협회장으로 있던 시기라 스피커 교체하면서 세미나도 열었는데 메이어 사운드의 치프 엔지니어인 Bob McCarthy를 한국에 최초로 초청했어요. 제가 해외 공연장을 다니며 궁금증을 가졌던 내용을 사전에 모두 전달하였죠.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의 센터 스피커의 역할은 무엇이고, 위상을 어떻게 컨트롤하고, 음상 실현을 위하여 센터와 딜레이 스피커로 어떻게 딜레이를 조절해야 되는지 등에 대해 모든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저에게도 아주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되었어요. 세미나는 3일을 했는데 거기서 처음 세미나를 들은 친구들은 다 무릎을 탁 치는 거예요. 왜 이런 것들을 진작에 몰랐는지. 어디서도 가르쳐주질 않잖아요. 어떻게 해야 소리를 잘 만드는지, 프로세스는 어떻게 운용을 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은 오직 스피커를 연구하는 사람들만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물리학적인 지식에 대한 공백이 많았는데 이 세미나가 그런 기술들을 배우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됐어요.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과 극장의 포맷이 여기서부터 체계화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입사 당시 공공 공연장계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57년 시공간이라 불리웠던 명동국립극장, 73년 국립극장, 78년 세종문화회관, 81년 아르코예술극장과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87년 국립국악원, 88년 예술의전당 음악당, 그리고 93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등이 개관된 것이 우리나라 공연장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극장들도 있지만 스태프를 갖춘 서울 시내 공연장은 이 정도였어요. 그리고 90년대에 지자체가 생기면서 지방 공연장들이 순식간에 많이 생겨났고 그렇게 국내 공연장이 점점 활성화가 되었죠.

국립극장이 우리나라 공연장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 뭐냐면 전기음향학적으로 설계된 최초의 공연장이라는 거예요.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시니엄 극장이기도 하고, 진공관 PA 앰프에 LCR 스피커는 알텍 스피커로 하이·미들 로우·서브 우퍼의 3-way로 설계돼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 제가 시스템을 공부하면서 너무 재미있었던 게, 그 당시에 서라운드 시스템이 있었단 거예요. 실링 스피커, 좌우측 월 스피커, 백 스피커도 있고, 음상 개념을 따져서 딜레이 스피커도 설치되어 있고 콘솔은 당시 National이라고 일본에서 만든 건데 8 bus에 4 aux의 아날로그 콘솔이었어요. 아날로그 딜레이 머신도 있었는데, 네덜란드 필립스 제품으로 연결된 테이프가 원통에 말린 릴 녹음 tape에 녹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장비로 시간을 지연시켜서 소리가 다시 들어가고 지연시켜서 다시 들어가고… 기가 막힌 아날로그 장비였어요.

2000년 국립극장에서의 오진수 고문
2002년 협회 기술 세미나

국립극장 장비의 디지털화도 고문님께서 추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시절 제가 음향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 공연장 무대에는 무대, 조명, 음향 등 여러 팀이 있지만 음향은 항상 제일 뒷전이다는 걸 항상 느꼈어요. 당시 조명 콘솔은 간단하게 메모리를 할 수 있는데 우리 음향 CADAC 콘솔은 당시 메모리가 VCA 페이더 정도였습니다. 아날로그 믹서 페이더에 마킹 테이프를 붙여 ‘여기까지는 1번, 여기까지는 2번, 3번…’ 하고 마킹하고, 대본에다 ‘1번 채널 몇 dB’ 이런 식으로 적어서 메모리를 했어요. 

당시 약주를 즐겨하는 극장장이 연출을 자주 하였는데 음향 담당은 항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전 리허설로 메모리를 하고 점심 먹고 다시 와서 오후 리허설을 하면, 연출이 들어보고는 왜 소리가 그 모양이냐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조명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 해요. 조명에 뭐라 하면 ‘오전에 메모리 한 그대로예요’ 한 마디면 모든 게 지나갑니다. 음향은 그게 통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공 선생님이 종종 연줄에게 잔소리(수모) 듣는 걸 옆에서 보는데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었죠. 우리도 조명처럼 메모리 기능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당시 정기 구독하고 있던 레코딩이라는 일본 잡지에서 ‘YAMAHA Pro Mix 01 출시’라는 디지털 콘솔 광고를 봤습니다. 당시 야마하 수입은 태영교역에서 했죠.  담당자에게 Pro Mix 01이 출시되면 저에게 제일 먼저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서 얼마 후 직접 받아봤어요.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디지털 콘솔에는 EQ가 저장되고, 신이 저장되고, 이펙터도 저장되고, 마이크 8채널 입력에 또 버스가 8개…. 공부를 할수록 막 미치겠는 거예요. 옳다구나, 이제 연출인 극장장을 내가 잡아버리겠다 하고는 공 선생님과 함께 이 콘솔을 임대해서 공연에 사용하면서 “선생님, 메모리는 제가 할 테니까 소리 들어 보시고 오케이 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했어요. 그 후에 있는 공연 리허설에서 연출이 오전엔 ‘소리 너무 좋다’ 하면 그대로 씬 메모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후에 오후 연로 오전에 한 장면들을 다시 연습하는데 역시나 연출은 소리가 다르다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다르지 않습니다. 오전 리허설 장면 콘솔에 모두 메모리 하였습니다. 바뀐 것 없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말씀드리니 연출이 직접 음향실로 와서 뭘 메모리 하였냐고 묻기에 ‘이것이 1번, 이게 2번, 3번… 모두 리허설 레벨 그대로 저장한 디지털 콘솔입니다.’라고 설명하니 그 다음부터는 “소리가 왜 이래”라는 말을 안 하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죠.

2000년 일본 야마하 공장에서의 PM1D 콘솔 교육

이후에는 YAMAHA O2R이 나오고 2대를 구입해 연동해서 관현악단 공연까지 모두 씬 메모리를 하며 공연을 했습니다. 국립극장에 디지털 콘솔을 성공적으로 도입하게 된 거죠.그리고 2001년도에 PM 콘솔을 들여왔어요. 들여오게 된 계기가 <우루왕>이라는 작품이었는데 무선 마이크만 24채널에 라이브 연주를 하고, 연극·뮤지컬·합창·무용 다 해서 실질적으로 입력이 70채널이 넘어가더라고요. 총체극이라 불렀는데 대본은 영화 대본 수준이었어요.

씬#1. 15명 떼거리. 씬#2. 모두 빠지고 4명이서 대사 주고받고. 그 다음에 8명이 떼창… 영화 장면처럼 빨리 전환되고 전환되고 해야 하는 거예요. 이건 O2R 2대로도 감당이 안돼서 다른 디지털 콘솔을 구입하려고 찾아봤는데 그때 STUDER와 NEVE에서도 콘솔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레코딩용이지 실제 PA용으로는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레코딩 잡지를 보니까 PM1D 192채널 출시. 딱 나오는 거예요.

직관적으로 48채널이 나와 있고 A, B로 클릭하면 바로바로 쓸 수 있으니까 96 채널을 쓰는데 거기에 입력이 A, B로 돼서 또 변환시키면 96×2를 쓸 수가 있고 출력이 버스만 24채널이니, 이건 뭐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또 수입사의 담당 직원에게 부탁해서 출시되자마자 구입했죠. 그 후 일본 야마하 공장에서 2주간 교육을 받은 후에 <우루왕>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스템으로 약 5년간 미국, 유럽, 남미, 아시아 투어 공연을 다녔습니다.

2002년 <우루왕> 오사카 공연, 홍윤석 감독(현재 용극장)과 함께

국립극장 시스템의 측면에서 하나의 변환점을 고문님께서 가져오셨군요.

공연 업계에서 우리 음향의 위상 제고가 필요하다고 몸소 느꼈거든요. 그 방안으로 했던 게 하나는 앞서 말한 디지털 콘솔의 도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음향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거였어요. 조명 디자인, 무대 디자인 이런 말은 있는데 음향은 그게 없는 거예요. 각 공연 단체에 ‘음향 디자인을 넣어주세요’ 라고 하니 모두들 음향 디자인이 뭐냐고만 물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가 디지털 콘솔을 사용하니 음향 디자인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하면서 ‘음향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그때부터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93년도쯤부터 시작해 2010년도쯤에야 돼서 음향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공연장에 정착된 것 같아요.

당시 일하시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앞서 말했던 <우루왕> 공연을 여름에 경주 반월 성터라는 야외에서 했는데, MEYER MSL-4 렌탈을 하고 Holleywood Edge라고 하는 이펙터 라이브러리에서 새 소리를 하나 찾아 프로툴로 직접 편집을 했어요. 그리고 그 편집한 새 소리를 야외에서 틀어 놨는데, 갑자기 스피커 위에 새들이 엄청 몰려드는 거예요. 그 소리가 아마 짝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나 싶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새들이 와서 달라붙는 게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나요.

2003년 <우루왕> 터키 아스펜토스 공연

또 한 가지 재밌었던 건 그때 발전차를 렌탈하여 전기를 받는데 전압이 180V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발전차 담당 직원에게 전압이 180V다, 이거 220V는 돼야 장비들이 제대로 작동이 된다 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별 상관없는 거였어요. 디지털 믹서, 파워드 스피커가 100~220V 프리 볼트 타입이었거든요. 그냥 놔뒀어야 했는데 렌탈 발전기 담당이 그걸 잘못 만져서 갑자기 380V가 되어어 콘솔도 스피커도 모두 다운이 된 거예요. 공연 이제 겨우 이틀 남았는데. 공연 못 하는 건가, 어떡하지, 하고 걱정을 하다가 확인해 보니 퓨즈가 단선된 거였여요. 퓨즈를 교체하고 전원을 투입하니 콘솔도 스피커 모두 살아나는 거예요. 그때부터 장비에 대한 신뢰가 크게 생겼죠. 그리고 나머지 아예 고장나버린 CD 플레이어 같은 장비들은 빨리 공수해오고 다시 준비를 해서 <우루왕> 공연을 올렸었어요.

2002년 협회 하계 수련회 족구대회

협회의 전신인 ‘소리회’의 창단을 함께 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소리회가 결성되었는지 궁금합니다.

80년도 후반부터 국내 공연장이 급속하게 개관되었고 무대 스태프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협회와 같은 협의체의 필요성이 와 닿았어요. 처음에는 공 선생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음향 단체의 초대 회장을 맡아주십시오’ 조심스럽게 건의를 드렸는데 선생님은 한철 선배를 추천하셨어요. 그리고 다수의 의견에 따라 서울 공연장을 위주로 발기하여 ‘소리회’라는 명칭으로 모임이 결성되었고, 초대 회장으로 한철 선배가, 2대 회장으로는 조갑중 선배가 맡아 운영하였어요. 두 분 모두 고생 많으셨죠. 또한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석하며 열정을 보였던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1992년 협회 동계 수련회

당시 음향 업계 내에서 소리회는 어떤 역할을 했었나요?

소리회는 음향협회를 알리는 매개체 역할을 했어요. 당시 국립극장에서 스태프 연수 제도라는 걸 실시했는데 급격히 늘어나는 지자체 공연장 개관 시 공연장 운영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수였어요. 스태프 연수와 지방 순회 공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국 공연장의 스태프들과 교류가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소리회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소리회가 전국 단위의 모임이 되도록 홍보하였습니다. 또한 박영철 국장님과 최웅집 회원 등의 고생과 노력으로 소리회지를 발행하면서 구성원들의 소식을 나누고 협업을 도모해 결속력을 점점 더 다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문님께서 4대 협회장이었을 당시 주력했던 사업은 무엇이 있었나요?

현재 매년 개최되고 있는 음향 전시회인 제1회 국제 음향 기기 전시회를 2003년에 최초로 열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음향인들의 축제의 날로 정하고 학술 발표 및 기술 발표 등 축제의 장을 구상하였는데, 계획이 점점 커지면서, 또 경비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전시회로 형식을 바꾸고 약 3년 간의 준비 끝에 전시회를 열게 됐어요. 코엑스 전시장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참여 업체를 모집하는 게 무척 힘들었죠.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국내 음향 산업 규모가 작고 대부분 수입 위주인 산업이라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제가 제일 중요시했던 ‘음향 스태프 간의 기술 교류와 위상 향상’을 이루고 공연 음향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전시회가 됐다는 점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80년대 후반부터 지방의 문화회관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공연장 운영 인력에 대한 문제가 생겼어요. 당시 지방의 감독들은 공무원 통신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공연장은 저녁에 업무가 이루어지므로 기피 부서가 됐고 음향에 크게 관심이 없는 분들이 근무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지방 공연장에는 전문 기술 인력 확보가 어려웠죠.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문화부에서 공연장 전문 인력 확보를 위해 무대예술전문인 의무 배치에 대한 공연법을 개정하여 공연장 의무 배치 기준을 마련하였습니다. 99년도에 공연법에 의한 자격검정위원회를 발족하고 2000년도부터 자격검정시험을 시행하였으며, 제2, 3기 자격검정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국립극장으로 자격 검정 업무를 가져오면서 관리 주체가 되었고 자격검정위에서 배출된 전문 인력을 공연장에 배치하여 오늘날과 같은 공연장 스태프 안정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음향실을 떠나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앞서 말씀하셨던 통신 감리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생소한 일인데요.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시게 됐나요?

이전에 감리 자격증을 따놨던게 계기가 됐어요. 극장에 근무하면 교육 시간을 채워야 하잖아요. 어떤 교육을 들을까 하다가 우연치 않게 2006년도에 정보통신공사 자격을 취득 후 이듬해 감리 자격증을 취득하였어요. 이후에 교수로서 정년을 하고 그 다음 새로운 길을 고민하다 보니까 감리 자격증이 생각 나더라고요. 그래서 예전에 통신 공사 회사를 운영하던 선배에게 감리 자격증이 있다고 하니 감리 회사를 소개해주더라고요. 건일엠이씨라는 감리 회사에서 의료 보험도 해결해주고 기본급도 받으며 6개월 정도 지났는데 공연장이 있는 복합 건물 현장에 가서 한 번 해볼 생각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음향은 내가 자신 있습니다’ 하고 감리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건축에서는 통신이라 함은 주차 시설, 전화, CCTV, AV, 전관 방송 같은 관련 시설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각 지자체에서 복합 건물 내지는 공연장을 많이 짓잖아요. 통신 감리분들은 음향 전문가가 거의 없으니 음향 시설이 많이 포함된 건물에 제가 가서 감리를 해요. 재미있는 게, 감리 일을 하다 보면 전에 알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것 또한 음향과 관련된 일이니까 대부분 아는 분들이거나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선후배들이다 보니 생활이 계속 연관이 되어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음향 하는 친구들이 미래에 제2의 직업을 찾고 있을 때 이 일을 소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중년의 감독들에게 좋은 조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죠. 꼭 필요한 이야기예요. 나이가 있는 감독들도 꽤 있잖아요. 사실 협회 세미나에 이런 꼭지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음향은 나이가 들수록 잘 안되잖아요. 저는 지금도 연출이나 음향감독으로 공연 제작에 참여를 하고 있는데 앞서 소개드린 것처럼 저는 300편 이상 음향감독으로, 음향디자인으로, 제작감독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최근에도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데 라이브 공연 믹싱은 잘 안 됩니다. 멀티로 녹음하고 믹싱해서 들어보면 꽤 괜찮은데 막상 라이브 공연에서는 잘 안 되더라고요. 아마 나이 들면 모두가 그러할 겁니다. 그러니까 나와 맞는 내 위치를 빨리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2의 직업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어쩔 수 없이 건강이나 노화의 문제로 그런 시기가 올 텐데 그럴 때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2011년 독일 부퍼탈에서의 <수궁가> 공연

은퇴 후에도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데, 일 외의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은퇴를 하고 나와서 오히려 더 바쁜데, 행복하고 즐겁네요. 하고 싶은 일을 자꾸 찾고 있다 보니까 요즘은 퇴근해서 헬스장 다니며 운동도 하고 있고, 색소폰에 관심이 있어 퇴근 후 연습실에서 취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바쁘게 생활하면서 삶에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 연구하는 학문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양자학이예요. 양자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형태를 쪼개고 쪼개 원자가 되고 그 안에는 전자가 있고…. 이런 식으로 공부하다 보면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고, 이루는’ 접근 방법을 알려주는 학문이 바로 양자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요즘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사활동을 종종 다니고 있어요. 이번에도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5월 마지막 주 화요일부터 태국과 필리핀으로 봉사활동 다녀오려고 티켓팅을 해놨습니다. 현지 교회에 가서 거기 있는 음향 시설 같은 것들 봐주고 오려고요.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1985년 경의 오진수 고문
2000년 음향감독 시절의 오진수 고문

정말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네요. 예전부터 바빴던 일상 속에서 연애와 결혼은 어떻게 하셨는지 그 스토리도 궁금하네요.

교회 청년부 활동을 같이 하던 자매를 만나서 연애를 시작했어요. 극장 생활을 하다 보면 다 저녁 늦게 공연을 하는데 우리 스태프들 대개가 아침 9시 출근하고 공연 끝날 때 밤 늦게 퇴근하잖아요. 당시 우리 와이프 직장은 충무로에 있었고 전 장충동이라 저녁 근무 있는 날에는 ‘와서 리허설이라도 보고 끝나면 같이 가자’ 해서 와이프가 극장으로 퇴근을 했어요. 국립극장이 주 데이트 코스였죠. 그렇게 약 2년 연애하고는 1986년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사실 가족들에겐 좀 미안한 게 많아요. 이 일을 하면 어쩔 수가 없지만, 투어 공연을 가면 짧게는 20일, 길게는 2~3개월 이상을 다녀오게 돼요. 그만큼 집을 종종 오래도록 비우다 보니까 우리 애들이 어떻게 컸는지에 대한 기억이 잘 없어요. 제일 안타까웠던 게 우리 아들 중학생 때 교회에서 그룹 공부하면서 ‘아버지에 대해 생각나는 걸 얘기해보자’ 했는데 우리 아들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대답한 거예요. 목사님이 저에게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활을 하셨어요?’라고 농담으로 웃으면서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그때 좀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우리 애들하고 집사람에게는 0점이구나. 그래서 이미 지나간 시간들이 많지만 이제부터라도 잘하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협회를 이끌어나가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일 중요한 건 지금 있는 걸 잘 지켜나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드는 건 참으로 어려운데 더 어려운 건 만들어진 일을 지키고 유지하는 거예요. 쉽지 않지만 기존의 것을 유지하면서 또한 발전시키고자 하는 철학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한 20년씩 장기 집권을 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대로 무언가를 바꾼다면 그건 유지가 잘 될 거예요. 그런데 지금처럼 협회장이 3년 내지 6년만 하는 구조에서는 그 기간 내에서의 빠른 변화들이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이미 만들어진 걸 하루 아침에 없애지 않고 꾸준히 유지해가면서 보완도 해야 우리의 뿌리가 사는 거예요. 그리고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 협회 일에 전담으로 하는 사람이 회장 업무를 수행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담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협회가 법의단체로서 정부 사업도 하고 음향 기술 발전과 음향관 련 국가 표준화 사업, 예를 들어 정보통신공사협회에서 벗어난 무대 음향, 공연 음향 관련 종사자들의 관련 업무 등 장기적인 과제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고는 있어요. 협회장도 이사장도 해본 입장으로서 제일 안타까운 부분 중에 하나예요. 

무대음향협회 뿐만이 아닌 SSM 발간 사업 또한 오래 이어져 나가려면 체계적인 시스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향 후배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떤 것에 관심이 생기고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복잡하게 생각 않고 그냥 바로 실행했으면 좋겠고, 열정이 있다면 공연을 많이 보길 추천해요. 좋은 공연들을 보면서 장단점을 분석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될 겁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음향에서 좋은 소리의 개념을 알 때 까지가 참 시간이 많이 소요되죠. 어떠한 소리가 좋은 소리일까요? 제 경우 약 15년 정도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지휘자 악보도 볼 줄 알고 박자도 이해하고 하니 음악에 대한 밸런스와 친숙해지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60세가 되면 대개 정년을 하잖아요. 그런데 수명이 길어지니 정년이 지나고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해요. 일을 더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앞서 말했듯 아직 현직에 있을 때 은퇴를 준비해야 합니다. 은퇴 후 제2의 직업으로 어떤 일을 할지? 자기 개발을 해야죠. 참고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통신 감리 일도 제 나이면 아직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보다 나이 든 사람이 훨씬 더 많거든요. 은퇴 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후배들에게 항상 말하는 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베풀며 살라는 거예요. 결국 나중엔 모두 다 나에게 되돌아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사는 것도 이제껏 베풀어왔던 것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것도 추천하는데 협회 차원에서 봉사활동을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현직의 사람들끼리 모여 결국엔 서로 단합도 되면서 함께 취미를 가꿔 나가면 그 삶이 매우 윤택해질 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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