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음향은 나의 운명
지난 32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박 임 서 세종문화회관 (전)무대기술팀장
친목단체로 출발했던 무대음향협회의 사단법인화를 추진하여 지금의 (사)무대음향협회의 위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며 지난 30여년 간 대한민국 무대음항의 역사와 함께 해온 세종문화회관 (전)무대기술팀장 박임서 감독을 만나 평소 나누기 힘들었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취재 | 구종회, 윤보라, 최아름
자료정리 | 최아름
01.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 무대기술팀장을 하다가 지금은 공무 연수를 하고 있는, 전문관으로 지내고 있는 박임서 입니다.
02. 당시 어떻게 무대음향 감독이 되셨는지요?
처음에는 전혀 계획이 없었죠. 살다 보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듯이 저도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는 일반 산업체에서 근무를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지역차별과 학연, 지연 이런 것들이 너무 심했어요. 거기서 직장 생활을 5년 가까이 하다 보니까 도저히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 안 보여서 서울시에서 올린 공무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를 했고, 아는 지인이 여기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서 뭐 하는데 인지도 모르고 썼는데 첫 발령지가 세종문화회관으로 된거죠, 그렇게 오게 되어서 무대 팀으로 발령이 났고, 여기 와서 음향을 처음으로 접한거죠.
02-1. 그러면 당시에 음향뿐 아니라 조명이나 혹 장치나 기계로도 갈 수 있었지 않았나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내 전공이 전기였어요. 그때 전자나 그런 건 없고 통신 쪽이 있었는데, 통신하고 우리하고는 좀 다른 부분이 있어서 음향 쪽으로 발령이 난 거죠.
02-2. 그럼 그 당시에 스피커라든지, 오디오 믹서 같은 것들을 처음 보셨을 텐데, 엄청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은데요?
모르겠어요. 저는 사는 동안에 어떤 새로운 환경이 왔을 때 ‘어차피 내가 가야 되는 길이다’ 라고 생각되면 거부감이라든지, 당황하고 그런 적은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는데, 내가 처음에 발령 와서 한 때가 ‘데이비드 카퍼필드’ 공연 기간이었어. 선배들이 무대로 데리고 갔는데 대형 톱날이 있고, 무대는 캄캄하고…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까 조금 주눅이 들었었지. 밝은 곳에 살다가 어두운 무대를 가니까 그런 것도 있고, 또 재미있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신비롭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03. 세종문화회관에서 근무하시며 많은 제작 공연 디자인을 하셨는데, 첫 번째 공연의 기억과 당시 분위기가 어땠나요?
사실은 예전에는 우리 음향 같은 경우는 공연장 스태프가 공연을 직접 운영하거나 관여하는 경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인식 자체가 조명 같은 경우는 역사가 깊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조명은 간혹 극장 스태프들이 디자인을 했는데 음향 같은 경우는 내가 들어왔을 당시만 해도 그냥 지원만 해 주는 역할이었고 렌탈에서 들어와서 다 하고 그러다 보니까… 몇 년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이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플레이부터 한 단계 한 단계 바라봐서 나중에는 오퍼레이팅까지 하면서, 이런 식으로 조금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죠.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마이크와 앰프, 스피커를 사용하니까 음질이라든지, 공연에 있어서 그 시대적 배경과 시간, 여기에 따라서 어떤 느낌을 줄 수 있는 것보다는 ‘그냥 소리만 잘 들리면 돼’ 이런 관점에 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9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서 음향의 디자인 개념들이 조금씩 잡혀가면서 전문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공연 제작자들이 음향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전에는 음향 스태프는 대우 받지도 못하고 심지어 콘솔 같은 경우도 한쪽 구석에 차리라고 한다거나 F.O.H에 나와서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를 안 해줬던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인식 변화를 시키는 데 엄청나게 힘들었었지.
03-1. 당시 1990년대의 공연장, 세종문화회관이 다소 경직된 공무원 조직이다 보니 디자인이라든지, 오퍼레이팅 같은 것들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대부분이었겠네요.
내가 여기에 처음에 왔을 때는 음향실, 조정실부터 해서 아침에 출근하면 청소하고 장비 청소하고 몇 달간 계속 그것만 했어요. 콘솔은 한 1년이 넘어서 만져본 것 같아요. 그전에는 그냥 선배들이 공연하면 옆에 서서 보고 특별히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이 없을 때는 이제 그런 식으로 많이 했죠.
그러다 보니깐 그때 세종문화회관 같은 경우는 대회의장 콘솔이 펀치 식으로 그냥 버튼 눌러주면 그 마이크가 선택돼서 나오는 그런 콘솔이었어요. 1년 뒤엔가 그걸 맡겨주는데 손에 땀이 엄청 흐르고 긴장이 돼가지고 (웃음) 지금 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처음으로 맡겨줬을 때 그 느낌 그걸 못 잊어요. 진짜 버튼 하나 누르고 손 땀 닦고 막 이렇게 했었던 때가 있고, 본격적으로 예술단 공연이라든가 이런 쪽에 한 것은 90년대 뮤지컬 활성화되면서부터 내가 관심을 갖고 하면서 95년도 경부터 하나하나 경험해가는 식으로 한 거죠.
참 그때는 힘들었고, 그러니까 마음이 힘들다기보다도 이렇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려고 하다 보니까 기존의 걸 배척하고 만들려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해서 공연 끝나고 배우들이나 관계자들하고 저녁 늦게까지 술도 먹고 그러면서 이제 하나하나 만들어 간 거지요.
04. 성취가 됐을 때, 인정받지 못하는 분야에 있다가 인정받기 시작하고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 굉장히 보람될 것 같습니다.
끝나고 나서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그거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고 그 말 한마디만 들으면 고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또 그전에는 프로그램에 제작진들이 전혀 안 올라갔었는데 이제 그것도 요구를 하게 된거죠.
한 번은 KBS 쪽에도 내가 요구를 했어요. 중계 쪽에, 왜냐면 본인들이 직접 현장에 음향을 하는 건 아니고 받아서 방송에 맞게끔 다시 자기들이 운영을 하지만 기본 믹싱은 이제 극장 제작진들이 다 해줬으니까 우리도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 해서 한동안은 이제 방송이 끝나면 자막으로 올라가기도 했었죠.(웃음) 다른 프로그램에도 이제 전체적으로 이렇게 하나 둘씩 올라가게 됐어요.
05.입사 당시의 오디오 콘솔은 어떻게 이루어 졌나요?
이브 콘솔하고 지멘스. 24, 2개 양쪽으로 해서 지멘스 48, 이브 48채널.
스피커는 처음에는 지멘스가 있었지, 지금은 극장에서 볼 수 없는데 중앙 집중 확산 식으로 센터에 쭉 1층 2층 3층에서 딜레이만 걸어서 하는 칼럼 스피커에 혼 스피커로 돼 있었어요. 거기에 터보3 가 부착이 돼 있었는데 이게 한 통씩이다 보니까 1층도 커버가 사실은 안돼, 그런데 그때 당시는 그걸로도 공연이 가능했다고 보는게, 대중음악이나 뮤지컬을 많이 안 했어요. 클래식이나 행사를 하다 보니깐 그 장비로는 충분히 했는데 점차적으로 환경이 변화한 거죠.
공연 환경이 변하다 보니 터보 소리는 1층도 커버가 안 되고, 그러다가 SS스피커가 들어왔는데 그것도 역시 1층 커버 정도밖에 안 되니까 뮤지컬이나 하면 민원이 그냥… 공연할 때마다 안 들린다, 욕은 다 듣고
그러다가 IMF 때 메이어 스피커가 들어왔었는데 메이어 스피커도 우리 대극장을 전체 커버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고, 그러다가 법인 되고 나서 현재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게 된 거죠. 그 뒤로 그런 민원들은 다 이제 해소를 시켰죠. 너무나 절실했으니.
05-1. 당시 뮤지컬 할 때 무선마이크 환경은 열악했을 것 같은데요.
그때 소니, 베가가 있었는데 수량도 부족했으니까 릴레이를 하는 거지. 대본 놓고 릴레이 표를 짜서 거기에 따라서 계속 들어갔다 나오면 바꿔 차고, 그러다 보니 마이크가 망가지는 일이 많은거지, 그래서 예비 마이크 몇 개 가지고 있고, 매일 옆에다 인두를 두고 공연 중에 계속 때우면서 했어요. 소니는 땀이 들어가도 그냥 털고 그냥 쓰면 되는 그런 마이크였고, 그 후에 이제 젠하이저 라던가 다른 모델로 바뀌게 된 거예요.
06. 디지털 환경이 도입되면 새롭게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은데 어떠셨나요?
디지털 같은 경우에는 한참 시간이 흘러서 99년도 전엔가 야마하 O2R이 나왔었어요. 그때는 그렇게 어렵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매뉴얼을 보고 개념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경로는 다 조작 운영 방법이 다를 뿐인 것이지 기본 경로는 같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적응을 해서 운영을 했었죠.
06-1. 음향 초창기보다는 굉장히 수월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생기는 거부감은 없었나요?
거부감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만 해도 갑자기 다운되고 할 때, 아날로그 같은 경우는 한 채널이 망가지면 다른 채널은 운영하는 데 문제가 없었는데 디지털은 에러가 나면 완전히 멈춰버리니까 그게 굉장히 당황스러운 부분이었고, 또 여름에 야외 공연을 할 때 높은 온도 때문에 에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선풍기를 다 틀어놓고 공연을 했던 그런 게 기억이 나네요.
07. 초반보다 시대가 굉장히 바뀌어서 음향 감독들의 위상이 높아진 것 같아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식 자체도 많이 바뀌었거든요. 내가 볼 때는 우리나라에서 전기음향이 발전하게 된 계기, 인정받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뮤지컬 붐이 점차 불면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전에 어린이 뮤지컬 같은 걸 할 때는 음향에 대해서 소리만 잘 나오면 된다고 했었지만 이제 점차적으로 활성화 되다 보니 그때부터 음향의 중요성이 바뀌고, 인식도 바뀌게 되니까 음향 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도 좀 바뀌고 그래서 지금의 오늘이 온 거죠.
07-1. 위상을 높이는 것에 협회가 큰 역할이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협회가 친목하는 모임으로 시작을 했잖아요. 그래서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 회원들까지 이렇게 점차적으로 번져간 건데 그때는 협회가 이렇게 역할을 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
처음에는 친목이라는 모임으로 음향 협회가 만들어졌지만 나중에는 회원들이 점차 젊어지면서 권익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 요구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내가 처음 음향 협회 회장을 맡고 보니 친목을 목적으로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협회가 공신력이 없잖아요. 공식적인 단체도 아니고, 회원들은 권익을 요구하는데 어디 누구한테 목소리 낼 수도 없고, 공문 하나 보낼 수도 없고, 어떤 역할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두 번째 협회장을 할 때, 법인체를 만들어서 우리 회원들이 회원들 자체 교육도 했어요.
권익도 해야 하겠지만 공식적인 법인이 됨으로써 그만큼 우리 회원들이 소속됐던 위상, 금전적으로 따질 수 없는 그런 위상을 올릴 필요도 있다고 해서 법인 설립 방안을 추진하게 된 거죠.
지금 협회의 직접적인 역할을 회원들이나 공연계에 영향을 미치려면 지금의 법인 체계에서 나중에 유니온 정도로 가야 실질적인 회원들의 권익, 그다음에 공연계에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협회 만들면서부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법인을 만들어서 기초만 만들어 놓자. 기초를 만들어 놓으면 후배들이 새로운 생각을 그 위에다가 거기에 맞는 건물을 올리면 되는 것이고, 하나씩 채워가면 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08. 협회 회장으로서 가장 힘썼던 부분에 대해, 사단법인을 만든 이후의 주력 사업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어쨌든 우리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단체로 그렇게 뭘 내세울 수 있는 그런 환경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법인 만들 때, 음향을 대표하는 단체를 만들고 싶어서 ‘한국음향협회’라는 그 타이틀을 그대로 끌고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한국’ 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면 안 돼서 두 번째 생각한 것이 ‘음향예술인협회’ 였는데 사이트를 찾아보니까 레코딩 협회에서 이미 선점해서 딱 거기서 또 걸린 거예요. 그래서 운영위원회를 열어서 ‘무대음향협회’로 해야 된다, 아마 하계 수련대회 때 그렇게 명칭을 바꿨던 것 같아요.
법인 만드는 과정에서도 참 힘들었어요. 이런저런 사업을 하려다 보니 그냥 이렇게 이런 공식 단체가 아니면 힘들더라. 우리는 서울시에 한정된 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회원들이니까 시도에 안 하고 건강보호 승인을 받아야 되겠다 그러면서 정관을 협의하고 찾아가고. 그때 우리 집행부 상당히 고생을 좀 많이 했죠. 그래서 2년 만에 승인을 받은 거거든요.
일반적인 단체 같은 경우는 앞에서 적극적으로 끌어주는 사람이 있고 또 뒤따라와주는 구성원들이 같이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설 때 잘 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기반만 만들어놓으면 후배나 선배, 또 더 뛰어난 사람들이 나머지를 채워가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교육으로 나는 우리 회원들 중 능력 있는 사람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교육 쪽을 많이 진행하고 싶었고 또 우리하고 공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 전에는 ‘업자’ 같은 호칭이 풍기는 뉘앙스가 별로 안 좋기 때문에 ‘기업체’로 호칭을 바꿔서 하는, 그런 어떤 주변 환경이라든지 이런 것을 바꾸고 싶었던 거죠. 나 혼자만 할 수가 없으니까 같이 더불어 살아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아마 이런 교육들을 첫 임기 때 조금 조금씩 만들어 갔던 겁니다.
09. 회장 임기 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무엇인가요? 회장으로서 만족스러웠던 것이 있나요?
사실은 만족이라는 건 없어요. 왜냐하면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여건은 안 되고 회원들이 바라는 건 많고 근데 그런 것을 해 줄 수 있는 조건은 안 되고 속은 답답한 거지. 고민은 많이 하지만 나 역시 먹고 살기 위한 직장 일이 있고 이것만 전담할 수도 없고, 사실은 힘들었죠. 그 기간들을 보내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회장 역할을 맡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회원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만나면서 얼굴 보고 하는 것들이 그래도 가장 좋았던 것 같고 또 재능을 가진 회원들을 많이 알게 되고 그러면서 각 회원들이 필요로 하면 연결해주고 했던 것이, 저 스스로 봤을 때는 그 사람들한테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줬다는 것, 그게 좀 보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10. 세종문화회관에 32년을 근무하며 느끼는 자긍심도 있으셨을텐데요.
내가 음향 협회에서 이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생각할 때 세종문화회관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해요. 내가 협회에서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사실은 원해서 했던 건 아니에요. 주변에서 다른 회원들이 좀 역할을 해 달라고 해서 처음 시작을 한 것이고 그전에는 뒤에서 지원해주는 역할을 했죠.
내가 세종문화회관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회 역할도 했던 것 같고 또 내가 이런 공연장, 우리 예술단체라든가 공연을 많이 하는 공연장에 있다 보니 그만큼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되고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런 거죠. 어떻게 보면 세종문화회관이 저에겐 든든한 둑이면서 큰 울타리인 거죠. 또 어떻게 보면 그 덕을 많이 본 것이고. 진짜 여기 안 있었으면 그냥 조용히 살지 않았을까 해요.
그리고 또 여기 있으면서도 그런 것에 도전해보고 싶지 않았으면 또 조용히 있을 수도 있었겠지. 주변에서 그만큼 도움을 많이 줬으니까 가능하지 않았을까 해요.
11. 나만의 신념, 혹은 철학이 있으시다거나 음향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아마 많이들 들어봤을 거예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난 오직 그거 하나.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힘든 것도 즐겁게 일을 할 수가 있죠. 또, 긍정적으로 만들어가는 것. 내가 긍정적으로 대할 때 다른 사람들도 그만큼 편하게, 긍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자기가 맡은 역할에 대한 것은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거고, 그 외적으로 인간관계부터 여러 가지가 있잖아, 인간관계를 좋게 해야 그만큼 나에게 기회도 많이 주어지고 또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잡을 수가 있어요.
근데 인간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기가 참 힘들어요. 예를 들어 ‘내가 하는 일이 힘들어, 내가 이걸 왜 해야 돼, 이만큼만 해주면 되는데 왜 이거보다 좀 더 해줘야 돼, 저 사람하고 한 번 만나고 끝날 텐데 왜 이렇게 가깝고 즐겁게 편안하게 대해야 돼’ 이렇게 생각하면 머물거나 도태 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렇지만 어차피 해야 될 일 즐겁고 재미있게 하자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을 하는 거고, 저 사람한테 한마디를 해도 좀 편안하게, 이렇게 즐겁게, 긍정적으로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거죠.
12. 무대음향협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우리 협회가 좀 더 발전할 수 있으려면 현재 집행부, 이사들, 각 지부장 그리고 구성원들 모두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줘야 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죠.
항상 앞에서 이끌어가는 이사님들, 협회장들과 이사장들이 보이지 않게 고생을 많이 하니까 어떤 사항들이 결정되면 적극적으로 좀 따라주고, 또 뭘 필요로 할 시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면 협회가 더 발전해서 나중에는 권익까지 보호할 수 있고, 더 나가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는 우리가 지금 예산 같은 것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인 거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해결이 된다면 회원들의 경력관리,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체계까지 갖춰야 되거든요. 그러려면 예산이 좀 수반이 돼야 하는데 그게 또 숙제이고, 근데 언젠간 해야 할 것 같아요.
13. 앞으로의 인생 제 2막이 시작이 될 텐데 계획이나 꿈이 있을까요?
사실은 코로나가 아니어도 내가 이제 나이를 먹다 보니까 참 눈치를 많이 보게 되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젊었을 때는 그냥 닥치는 대로 그렇게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우리 후배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다 보니까 자꾸 축소가 돼. 아시다시피 사업을 한다는 건 물론 도전해볼 수도 있겠지만 여러 환경이 그건 안 맞는 것 같아요. 특히 음향 업계에서부터 경쟁이 너무 심해요. 그래서 사업 쪽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지금으로서는 그냥 지금까지 이렇게 직장생활 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사람의 생명이 무한한 게 아니다 보니까 계속 일만 해야 되나 그런 생각이 이제 부쩍 들어요.
저는 그냥 남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삶을 앞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데 그래도 몇 년간은 기회가 된다면 조금은 어떤 일이 됐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