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대음향의 살아있는 신화
박 영 철 전)LG아트센터 총괄국장
세종문화회관, 워커힐호텔, 예술의전당, LG아트센터, GS여수예울마루. 국내 유수의 공연장 무대음향감독과 총괄 기술감독을 두루 역임하며 43년간 대한민국 무대음향의 역사를 함께 해온 (사)무대음향협회 박영철고문. 특히 초기 설계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된 LG아트센터(역삼)는 국내 공연장의 무대음향 기술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여겨진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쌓인 방대한 자료와 노하우를 집대성하여 출간한 음향 전문서 적은 현재까지도 후배 음향인들의 필독서로 추천되고 있다. 이처럼 내딛는 발걸음 마다 국내 음향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무대음향의 살아있는 신화, 박영철 고문을 2023 KOSOUND 현장에서 만나보았다.
취재, 사진 | 성재훈
편집 | 김수정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름은 박영철이고요. 세종문화회관, 워커힐 호텔, 예술의전당, LG아트센터(역삼), GS칼텍스 예울마루에서 근무를 했고, 1980년부터 시작해 약 43년간 음향을 해왔습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극장을 두루 다니시면서 오랜 시간 무대음향을 하셨네요.
그런 셈이죠. 한 20년 동안은 무대음향 업무를 했고 한 20년은 관리직으로 일을 했어요. 관리직으로 일할 때는 주로 음향 컨설팅, 자문과 같은 외부 활동을 많이 한 편이에요.
첫 극장인 세종문화회관에는 어떻게 입사하시게 되었나요?
예전에 청계천에서 앰프 만드는 회사를 같이 다녔던 친구가 소개해서 가게 됐는데 당시 구술 시험 면접관이 돌아가신 박래선 선배셨어요. 사실 처음엔 이런 일인지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군대 막 제대해 부모님한테 계속 신세 질 수는 없고 일단 아무 데나 들어가보자 해서 호구지책으로 들어간 게 세종문화회관이었죠.
당시 극장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직원이 7명인데 그 중 음향 실장님과 날 소개해줬던 친구 단 둘만이 믹싱 콘솔을 만질 수가 있었어요. 콘솔을 만져보고 싶은데 못하고 저는 무대 가서 마이크랑 케이블이나 깔고 잔심부름만 했어요. 콘솔은 독일 지멘스Siemens에서 오더메이드한 거였는데 무슨 비행기 조종간 같이도 생겼고 스위치가 엄청 많은 게, 처음에 보니까 겁나면서도 되게 궁금하더라고요. 그런데 못 만지게 하니 공연 때 퇴근하라고 해도 안 하고 뒤에 서서 지켜만 봤죠.
하루는 저한테는 음향실에서 전화 받으라 하고 그분들은 다른 데 작업을 하러 갔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전원을 켜고 노브 하나를 동작시켜 봤는데 소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다시 원위치시키고 전원을 꺼놨는데 조금 이따가 무대에서 쫓아오고 막 난리가 났어요. 윈치 마이크가 무대 바닥으로 떨어진 거예요. 공연이 없어 무대 불이 꺼져 있으니까 안 보이는 통에 사고를 친 거죠. 그래서 실장님한테 호되게 혼나고 출근하면 아무것도 안 시키고 창고에 가둬놨는데 일주일 만에 제가 열고 뛰쳐나왔어요. 무대에서 선배들이 마이크 설치하고 있는 걸 뺏어서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제가 했죠. 그랬더니 실장님이 너같은 놈은 처음 봤다면서 제일 막내였던 제게 믹싱 콘솔을 만져보게 해주셨어요. 막내가 그걸 만지기 시작하니까 제 위로 선배들도 다같이 만질 수 있게 됐어요. 저 때문에 전통이 깨진 거죠.
모든 게 새로우셨을 것 같은데 첫 극장에서의 근무는 어떠셨나요?
사실 입사할 때만 해도 음향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일해 보니까 나한테 딱 맞는 거예요. 나한테 딱 맞는다는 게, 공고를 다녀서 고3 땐 작은아버지 회사에 취업한 걸로 해 고등학교를 2년만 다녔어요. 그러고는 1년 동안 제가 직접 만든 앰프하고, 청계천에서 유니트만 사다가 합판으로 통을 짜 만든 스피커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악기 잘하는 선배 밴드들이 지방으로 콩쿨 나가는 걸 따라다녔어요. 1년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그게 음향 스탭이 하는 일인지는 모르고 했어요. 그냥 좋아서 따라다닌 건데 세종문화회관 입사를 하고 나서야 ‘이게 직업이 될 수 있구나’ 했죠. 또 제가 소설을 쓰고 싶어서 그 당시에 소설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공연장의 예술적인 분위기들이 제가 원했던 세상인 거예요. 전자과를 나와 여러모로 유리하기도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나에게 최적화된 직업이다 싶었죠.
그래서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어요. 당시 국내에는 관련 서적이 없어 일본 책으로 음향 공부를 해봐야겠다 싶어 학원 다니면서 일어 공부를 했지만 그때는 해외 서적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 책 구하기가 생각보다도 더 어려웠어요. 나중에 워커힐에서 일할 때 일본 스태프들하고 작업을 많이 했는데 내가 책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하니 친구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 책을 열 몇 권을 사서 택배로 보낸 거예요. 그래서 그 책으로 공부하고 그랬어요. 고마운 친구죠.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주로 어떤 공연을 했나요?
공연이야 그 당시에도 다양하게 했어요. 상주 단체가 꽤 많이 있었는데 국내에서 유일하게 뮤지컬을 했던 가무단이라는 단체랑 무용단, 시향도 공연을 했고, 당시 서울 시내 공연장에 연극이 대세라 예술적 성향이 높고 철학적인 연극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또 특이했던 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해마다 거기서 했던 거고, 기억에 남는 공연 중 하나는 폴 모리아 악단의 모든 내한 공연을 거기서 다 했던 거예요.
세종문화회관에서 워커힐 호텔로 옮기시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복잡한 개인 사정이 있었어요.(웃음) 사실 세종문화회관에 다니면서 사람들한테 예쁨을 받아서 다른 데 소개를 많이 받았어요. 워커힐도 그렇고, 우리나라 최초 사내 방송국인 대우 방송국이 생겼을 때에도 그렇고. 그런데 월급을 배를 준다 해도 몇 번을 사양했었어요. 실장님이 이상한 놈이라며 이유를 물어보셨을 때 ‘거기는 무대가 없잖아요’ 대답했죠. 말했던 것처럼 저는 소설을 쓰고 싶었으니까 관련 분위기 속에서 생활을 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서 만나는 예술가들이 좋고 공연과 상관없이 나누는 대화들도 좋아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세종문화회관 근무를 했었어요.
그런데 동생이 대학 갈 시기가 됐는데 집에서 형편이 넉넉지 않아 대학을 안 보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벌어서 제가 보내겠다고 선언을 했어요. 마침 이때 지방에 있는 유명 회사의 콘도를 소개 받았는데 그때 제 월급이 14만 원이었는데 거긴 월급을 50만 원을 준다는 거예요. 그 돈이면 나랑 내 동생 둘 다 학교를 다닐 수 있겠다 싶어 가겠다 하고 세종문화회관에 사표를 냈죠. 근데 출근 3일 정도를 앞두고 그 회사에 어떤 큰 경제 사건이 터져서 회사가 시끄러우니 없던 일로 하자며 입사가 무산돼버렸어요. 중간에 붕 떠버려서 곤란했던 중에 마침 워커힐에서 세 번째로 프로포즈가 와서 무조건 가야겠다 싶어 워커힐로 가게 된 거예요. 그때가 84년도였어요.
갑작스런 이직 후 워커힐에서의 일은 어떠셨나요?
워커힐에서 하는 공연은 재밌었지만 처음엔 아쉽기도 했어요. 순수 예술인들과의 교류와 작업이 저에게는 정말 중요하고 재밌는 공부였는데 위치도 서울 외곽 쪽이고 우선 회사에 충실해야 하니 그 사람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게 처음에는 아쉬웠어요. 대신 일하면서 믹싱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어요. 선임이 윤원준씨라고 녹음 엔지니어 출신의 굉장히 유명한 분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음반의 절반은 그분 작품이었죠. 그분께 믹싱을 많이 배웠어요.
워커힐에서는 주로 어떤 공연을 했나요?
물랑루즈 쇼나 라스베가스 쇼 같은 쇼 제작을 주로 했어요. 당시 국내엔 그런 쇼 제작 전문 단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문 단체가 주로 왔는데 종종 오던 음향 책임자가 항상 저를 옆에 두고 일을 시키면서 많은 걸 알려줬어요. 그 사람에게도 편집하는 걸 많이 배웠죠.
근무하시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들도 궁금합니다.
일본 미쓰비시에서 만든 어떤 기계가 고장이 났는데 호기심에 뜯어봤다가 아주 혼난 적이 있어요. 워커힐은 출근이 오후 2시쯤이었어요. 오전에는 아무도 없으니 아침 일찍 나가서 기계를 뜯었죠.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이상이 없고 원인을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다 출근 시간이 다 돼서 얼른 덮고 조립을 하다가 퍼뜩 생각이 난 게, 기계를 점검할 때 지켜야 할 순서가 있는데 마음이 급하니까 처음에 그 순서를 안 지킨 거예요. 보니까 퓨즈가 나가서 땀 흘릴 정도로 혼난 적이 있어요.
워커힐에서 약 3년 간의 근무를 마치고 예술의전당으로 이직을 하십니다. 이때의 이야기도 궁금한데요.
87년 12월 초에 예술의전당으로 갔는데 그때 운이 좀 좋았어요. 사실 전부터 예술의전당에 가고 싶었는데 여기는 당시 전부 공채였기 때문에 기회가 드물었고 제가 대학을 못 갔으니 응시 자격도 안 됐어요. 그래서 고민하면서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마침 워커힐 내 타 부서의 한 분이 예술의전당 무대기술팀장으로 가신 거예요. 그러면서 조명 한 분과 음향의 저를 뽑아서 데리고 가셨어요. 정말 운이 좋게 거기에 끼게 된 거죠. 그렇게 제가 원했던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게 됐습니다.
극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솔직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일보다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기존에 공채 1기가 있고, 타 부서에서 무대팀으로 전과돼서 온 분들이 있고, 제가 첫 특채로 입사를 했는데 이렇게 세 집단 사이에 화합이 잘 되지 않았어요. 또 음향 경력 있는 사람도, 음향 공부를 하는 사람도 저밖에 없어서 다 가르치며 해야 하는데 잘 따라주지도 않아서 힘들었죠.
생각나는 일화가 두 가지 정도 있는데, 공연장이 여러 개 있으면 저기 공연장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부족한 장비를 여기 공연장에서 몰래 가져가 설치를 해버리는 거예요. 저는 셋업을 해놓고 공연 전에 테스트를 하는데 어디 소리가 비어서 가보면 스피커가 없어져 있고. 지나고 보니까 재밌는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았어요.
또 다른 건, 독일 공연장을 견학 가는 자리에 제가 가기로 돼있었는데, 누가 경영진한테 가서는 이 사람 보내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회사에 서류까지 다 제출했는데 출발 이틀 전쯤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처음엔 많이 낙심했지만 오히려 독일을 못 간 게 더 큰 공부가 되기도 했어요. 떠나고 남은 사람 중 직급이 제일 높은 사람이 저라서 콘서트홀 운영도 제가 직접 하며 갑자기 팀장 노릇을 하게 된 거죠. 어린 나이에 부장님들 사이에 앉아 긴장하며 부장 회의에 참석도 했고, 어려웠지만 새로운 경험이었고 배운 게 많아요. 살면서 항상 느끼는 게, 나쁜 일이 꼭 나쁘지만은 않더라고요.
마음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워커힐과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공연의 성격이 서로 달라서 이 또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간 쌓아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지만 공연 장르가 다르다 보니 어려운 점이 있긴 했어요. 콘서트홀은 주 업무가 레코딩이었는데 클래식 녹음에서의 마이킹이나 믹싱 방식이 워커힐에서 배웠던 재즈 등과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클래식은 예술의전당에서 처음 해보느라 해외 원서와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며 어떻게 하는지 공부했어요.
힘들었지만 그만큼 또 좋은 경험이 되었던 시간이군요. LG아트센터로의 이직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LG아트센터의 초대 대표인 김의준 대표님이 원래 예술의전당 공연 부장님이셨는데, 그 분이 LG아트센터로 가시며 음향 파트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걸 제가 예술의전당 근무하면서 틈틈이 도와드렸어요. 저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을 놓고 약 1년간 이런저런 미션을 주면서 테스트를 하셨는데 그 중에 제가 뽑힌 거예요. 그렇게 1년 정도 도와드리다가 자리를 옮기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주셔서 망설임 끝에 1997년도에 LG아트센터로 가게 됐습니다. 차장으로 갔는데 그 월급이 예술의전당에서 받던 과장 월급보다 10만 원이 적었어요. 가족 모두가 반대했는데 당시 사람 때문에 지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또 새로 공연장을 짓는 것에 대한 욕심도 났고요. 예술의전당에서 공사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진 못하고 운영만 했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기도 해서 집에서 반대하는 걸 무릅쓰고 갔습니다.
공사는 어떻게 진행이 되었나요?
원래 미국 업체에서 하도록 계약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일 처리가 좀 빠른 편이잖아요. 그 회사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일하기엔 속도가 너무 느린 거예요. 발주 주고 3달 동안 받은 도면이 하나도 없어서 이건 문제가 있다 싶어 미국으로 쫓아갔어요. 이제까지 그린 도면을 요청하니 딱 두 장을 줘요. 여태까지는 스터디를 했고 이제부터 그리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여기는 우리하고 일하는 방식이 너무 맞지 않다 싶어 그 자리에서 대표님께 전화드려 ‘이 업체하고 거래 중단하겠습니다’ 했더니 대표님이 제 판단을 믿고 오케이 하셨어요. 그리고 국내 업체를 새로 선발해서 설계팀만 우리 사무실에 상주를 시켰어요. 도면 한 장 그릴 때마다 저에게 바로 컨펌 받고, 수정할 건 바로 하도록 해서 설계 진행에 속도를 높였어요. 그냥 일에 파묻혀서 살았죠. 처음으로 무대에서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어요.
모든 부분을 관장하시면서 정말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말씀하셨듯이 공연장 설계 공사는 처음이라 모든 게 생소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이때 음향뿐만 아니라 무역에 관한 것도 많이 공부했어요. 처음 무역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건, 어느 날 대표님이 갑자기 제목을 하나 불러주시면서 이에 대해 기획안을 내라는 거예요. LG는 모든 걸 우리가 직수입해서 수출입 업무도 봐야 했거든요. 어떻게 하나 아무리 궁리해봐도 모르겠어서 기안서에다 제목만 적어 내밀었더니 대표님이 보시고는 저를 쳐다보시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초안만 한 번 잡아주시면 그 다음부터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해서 초안 주신 걸 토대로 다시 기획안 결재를 받았어요. 그리고 일주일 후쯤 대표님께 『무역 실무』라는 책을 받았는데 무역 용어를 모르니 책을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예술의전당에서부터 안면 있던 당시 태영교역의 윤호철 부장이 무역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아서 두 달 동안 매일 저녁 그 친구한테 무역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아직도 만나면 제가 은인이라고 늘 말해요.
그리고 공사 과정에서 제일 어려웠던 게 접지였는데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적절한 서적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음향 시스템은 접지가 두 개가 필요한 것과 같이 공연장에 특화된 자료가 필요한데 없는 거예요. 어렵게 캐나다 책을 구했는데 설비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있길래 사전 찾아보고 영어 잘하는 친구에게 물어가며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마침 또 오사카에서 접지 관련 세미나를 하는 걸 우연히 알게 됐어요. 예술의전당 조명 직원 중 일본 살다 온 사람이 있었는데 집이 또 오사카래서 그 친구를 데리고 제 사비를 들여 가서 세미나를 들었죠.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게 스타 그라운드 시스템을 LG아트센터에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엔 생소했던 음장 가변 장치도 LG아트센터에는 있었죠. 이것도 고문님께서 설계하신 건가요?
음장 가변 장치는 개관 후에 대외비로 진행했어요. 처음 미국 업체에서 설계한 것 중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프로시니엄 아치가 반사가 아닌 흡입면으로 돼서 거기서 소리가 감쇄되어 객석 앞쪽 잔향이 부족한 거예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음장 가변 장치 시장 조사를 해보니 네덜란드에 있는 SIAP이라는 곳의 제품이 가장 적합하더라고요. 현지로 출장을 가 확인했을 때도 제일 마음에 들어서 그 당시에 한 5억 정도 됐었는데 대표님께 보고를 드려서 진행을 했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희귀했는데, DSP로 지향 각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이탈리아제 컬럼 스피커가 있었어요. 이 스피커도 활용해서 객석 앞쪽 잔향 문제를 보완했죠.
이런 노력들이 있어 좋은 평가 속에 LG아트센터 준공이 완료됐네요. 그 이후의 업무들은 어떠셨습니까?
개관 후에는 주로 관리직으로 있으면서 전반적인 업무를 했는데, 이제 관리직에 있다 보니 주로 직원들 감시하는 일을 하게 되잖아요. 맨날 노는 것 같이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돌아다니면 직원들이 눈치를 보니까 반대로 저도 직원들 눈치가 보이고. 이제 사무실에 앉아있는 이 시간을 내가 유용하게 써야겠다 싶어서 이때 책 출간 작업을 했어요.
그동안의 공부와 현장 경험을 토대로 책을 집필하게 되셨군요.
맞아요. 『무대음향설비』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무대음향개론』, 『공연장 건축 설계』가 나왔어요. 『무대음향설비』는 공연장 설계 공사를 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공부하며 모은 자료가 많았는데 이걸 그냥 썩혀두기가 아까운 마음에 정리를 해서 책으로 낸 거예요. 『무대음향개론』은 자격증 제도가 생기고 처음 나온 교재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던 마음에 음향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조금 더 좋은 책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교재로 생각하고 쓴 책이죠.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자문을 다닐 때 건축 회사 측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는데 이 분들이 생각보다 공연장을 잘 모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공연장을 건축·설계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싶어서 가이드북으로 『공연장 건축 설계』를 썼습니다. 그동안 모은 저만의 자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책을 쓰게 된 것 같아요.
이제 LG아트센터를 떠나서 GS칼텍스 예울마루로 이직을 하십니다. 그 계기도 궁금한데요.
LG 정년 한 달 남겨놓고 퇴사해서 여수로 내려갔어요. 예울마루의 전임자가 이직을 하면서 당장 자리가 비니까 내가 얼른 가서 이 자리를 충원해야 하는데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그걸 미룰 필요가 있나요. 10년 함께 일해온 친구들이 충분히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다 성장을 했으니까 더 망설이지 않고 사표를 내서 예울마루로 새로 들어갔죠.
예울마루에서의 근무는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덜 바빠서 시간 여유가 많았어요. 여수가 먹거리도 많고 놀러 다니기도 좋아서 쉬는 날 되면 무조건 여기저기 다니고 산에 가며 운동하던 기억이 제일 많이 나요. 몇 년 그렇게 살다 보니 계속 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좋은 도시예요. 공연장 운영도 아주 잘 되었어요. 광주를 제외한 호남 지역에서는 예울마루가 대표적인 극장이 됐죠.
여수에서 시집도 하나 발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별 연습』이라는 시집이에요. 한풀이죠 한풀이. 내가 50 초반일 때 우리 처가 암에 걸려서 8년 동안 앓다 갔는데 그 기간이 엄청 힘들었어요. 우리 처가 아픈데 우리 어머니는 뇌출혈이 와서 와상 상태에 계셨고, 또 1년 후 아버지의 치매로 집에 중환자가 3명이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렇게 처를 먼저 보내고 더 좋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적은 시집이에요. 사실은 내가 책을 내려고 쓴 게 아니라 잠 안 오고 그럴 때 틈틈이 썼던 건데 그걸 지금 같이 살고 계시는 분이 보더니 이거 그냥 묻어놓지 말고 책으로 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게 됐어요.
새벽별바라기
– 박영철
차가운 별 빛 사이로 새벽이 지나갑니다.
머리위로 쏟아지는 별 빛이
당신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둡고 을씨년스런 새벽하늘에
왜 당신을 사랑했을까요?
당신의 슬픈 눈을 보았을 때
외면할 수 없는 운명이 목줄을 쥐었을 때
나를 보는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사랑은 겨우 새끼손가락 하나로
완전한 것처럼 굴지만
마음은 늘 서로 조금씩 어긋납니다.
별 빛이 찬 것은 당신과 나의 거리 만큼인가요?
좁혀도 좁혀도 좁혀지지 않는
늘 그만큼의 거리에 있는
당신이 안타까워
때론 차라리 별똥별이고 싶습니다.
머리위로 별빛이
외로움이 우박처럼 쏟아집니다.
외로움의 크기만큼 사랑은 깊어가고
새벽이 저만큼 별 무리사이에서 가물가물 합니다.
예울마루에서의 4년을 마치시고 지금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지금은 강동문화재단하고, 아직 설립 전이지만 GS 재단 TF팀의 리노베이션 작업에 자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유유자적하고 있는데 이제 무릎이나 허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산에는 안 다니고, 당구 치는 것과 그림 그리는 걸 배우러 다니고 있어요.
정말 바쁘게 살아오셨는데 그 속에서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되셨습니까?
결혼은 86년도에 워커힐에 있을 때 했어요. 우리 이모하고 우리 처 이모가 서로 동서지간인데 이모들끼리 ‘우리 조카 있어’ ‘우리도 조카 있어’ 해서 소개를 받아 연애 없이 결혼하게 됐어요. 처음에 만났을 땐 결혼 생각이 없었어요. 그 당시 제 머릿속에는 돈 모아서 일본 유학 갈 생각밖에 없었으니까요. 한 700만 원 있으면 일본 가서 한 2~3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3년짜리 700만 원 적금을 들었는데 적금 겨우 세 번 들어갔을 때 갑자기 결혼하게 됐어요. 그래서 나중에 와이프한테 ‘일본 가서 공부를 하고 올 테니 당신이 애를 3년만 키워주면 안 될까’ 했더니 심각한 상황이 벌어져서 포기했습니다. 대신 부천대학교 야간대학에 입학했는데 수업 들어가보니 생각했던 수업 분위기가 아닌 거예요. 뒤에 앉아있는데 강의실 뒷문 열어놓고 정신 사납게 다들 들락날락하고. 교수도 나보다 어린데 내가 앞에 앉을 수는 없잖아요.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교수들하고 술만 먹고 있으니까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한 학기 다니고 말았어요. 교수가 계속 전화해서 등록만 하면 졸업장 내준다고 했는데도 거절했어요. 공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하고 이후로 학교에 대한 미련은 다 버렸죠.
자녀분들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들만 둘인데 지금 하나는 장가 가고 하나는 아직 안 가고 따로 살아요. 원래는 애들 군대 제대하고 학교 졸업하면 무조건 다 내보냈어요. 너네들끼리 알아서 살라 하고 원룸 하나씩 얻어서 다 독립 시켰죠. 그래서 와이프 먼저 보내고는 한 6개월을 혼자 살았어요. 큰 애는 직장이 멀어 분당에서 따로 살고 있었고 작은 애는 이태리에서 공부 중이었기 때문에 큰 집에 나 혼자 썰렁하게 6개월 지냈는데, 이러다가 내가 병 걸릴 것 같더라고요. 도저히 안되겠어서 안양에 조그만 집을 얻어 두어 달 더 혼자 살았는데 아버지 외롭겠다며 분당 사는 놈은 안양이면 회사 다닐 수 있다 하고 다른 놈은 공부 마치고 졸업해서 들어와서 결국 남자 셋이서 살기도 했어요.
(사)무대음향협회의 기원이 되는 소리회를 93년도에 창립하셨는데 어떻게 만들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주석길 선배랑 둘이서 점심 먹다가 선배가 먼저 말씀을 하신 게 동기가 됐어요. 기존에 협회가 있었는데 그건 방송계와 업체까지 모두 포함된 곳이라 각자의 주장이 다르다 보니 지지부진하다가 1년 정도 후에 흐지부지돼버렸어요. 그래서 주석길 선배가 협회를 만들고자 하는데 ‘네가 진행을 해보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하늘 같은 선배님이 시키시니 할 수 없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 일단은 서울 유명 공연장의 음향실을 대표하는 분들께 모여주십사 연락을 드렸어요.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여기 모이신 분들과 제대로 된 협회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말씀드렸고, 그 모임명을 ‘헤드 테이블’이라고 지어 수차례 회의를 거친 후에 ‘소리회’라는 이름으로 협회를 만든 거예요.
헤드 테이블이라는 준비 과정을 거쳐서 소리회가 탄생했군요.
그렇죠. 사실 협회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영하는지를 모르니 일단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미국 유니온의 조직 사례 같은 걸 스터디하고 제 나름대로의 기준을 만들어서 선배들한테 확인 받고 협의를 했어요. 제일 강력하게 주장했던 게 뭐냐면 업체는 절대 개입되면 안 된다는 것. 어떤 형식으로든지 누군가의 이익이 걸리면 이 협회는 언젠가는 깨지게 돼있으니 그런 개입을 막으려면 업체를 가입시키면 안 된다는 걸 중요시했어요. 만약 업체 소속 사람이 개인 자격으로 가입하고자 한다면 그건 생각해 볼 문제지만 일단은 공연장에 근무하는 사람, 자격증 소지자, 그 외에는 안 된다는 규칙을 세웠었죠. 이렇게 약 6개월의 준비 후에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소리회를 창단했습니다. 창단할 때 회원은 약 30명 정도 됐어요. 서울 큰 공연장의 감독님들은 거의 다 들어오신 거라고 봐야죠. 그래서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소리회 소식지같은 것도 열심히 만들었었어요. 초기에는 A4지로 프린트 해서 마치 ‘호외요’ 하듯이 돌리고(웃음). 제가 공부하던 것, 번역한 것 등을 기술 자료라고 해서 나눠주고 그랬죠.
협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협회를 만드신 분의 입장에서 지금의 협회를 바라보시기에 어떠십니까?
우리가 처음 구상했던 대로 잘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후배들한테 참 고마워요.
하나 말하고 싶은 건, 사라지는 회원들에 대해서 임원진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왜 회원들이 빠져나가고 협회에 관심을 안 갖게 되느냐에 대해 고민하고 개선 방안을 만들어야 해요. 개개인으로 봤을 때 내가 얻는 게 없다면 굳이 회비까지 내가면서 가입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회원들한테 무엇을 제공할지는 임원진이 항상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협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원래 제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게 전기음향학회를 만드는 거였는데, 협회에서 꼭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일단 학회는 논문이 필요한데 논문을 꼭 텍스트로만 만들어야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봐요. 예를 들어 예술 작품도 논문으로 인정을 해주듯이 우리가 믹싱 디자인한 것도 논문으로 볼 수 있거든요. 스타급 엔지니어들이 믹싱 설계한 자료라면 우리 후배들한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기록으로 계속 남기기 위해서 학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문님의 뒤를 이어 음향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학교에서 강의할 때 항상 종강하면서 했던 말이 있는데, 음향에 목숨 걸지 말라는 거예요. 음향은 ‘내 삶을 어떻게 영유할 것인가’에서 ‘어떻게’에 해당돼요. 그게 결국은 내 삶의 질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소홀히 하지는 않되,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죠. 가끔 보면 이게 뒤집히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가수가 있고 가수 마이크 스탠드를 설치하는데 영상 촬영도 있어요. 이때 마이크를 입에 정확하게 대야 한다며 스탠드를 바짝 올리는 친구들이 있어요. 전체를 못 보고 음향만 생각하는 거죠. 음향적으로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찾을 수는 있어도 전체적으로 봤을 땐 누가 이 사람의 능력을 인정해줄까 생각해요. 조화로워야 음향도 사는 거예요. 이런 것과 같이 음향에만 목숨 걸지 말고 전체를 보며 살아갈 수 있었음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없습니다. 그냥 막 살자가 저의 플랜입니다.